바흐를 구한 건 바흐가 아니었다
1829년 베를린, 스무 살짜리 청년이 낡은 악보 뭉치를 들고 지휘대에 섰습니다.
펠릭스 멘델스존. 유대계 은행가 집안의 신동. 할머니한테 선물로 받은 그 악보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바흐를 이렇게 알지 못했을 겁니다.
바흐가 1750년에 죽었을 때, 세상은 별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부고 기사도 변변찮았고, 그의 악보 상당수는 제자들과 아들들 손에 흩어졌습니다. 일부는 생선 가게에서 생선 포장지로 쓰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진위는 불확실하지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 정도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분위기는 맞습니다.
왜였을까.
바흐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요. 그가 활동하던 시절, 유럽 음악의 흐름은 바로크에서 고전주의로 넘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대위법보다 단순하고 우아한 멜로디를 원했습니다. 바흐의 아들들 특히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오히려 더 유명했습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잘나가는 시대였던 거지요.
바흐 본인도 이걸 알았을 것 같습니다. 그는 평생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일했지요 쉽게 말하면 교회 음악 감독. 매주 예배를 위한 칸타타를 써야 했고, 고용주인 교회 위원회와 끊임없이 다퉜습니다. 봉급 문제로, 학생 관리 문제로, 심지어 교회 밖에서 연주를 나간다고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천재였지만, 생전의 바흐는 그냥 교회 직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80년이 흘렀습니다.
멘델스존의 할머니 벨라 잘로몬은 손자에게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했습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필사본. 어떤 경로로 구했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합니다.
멘델스존은 그 악보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도 편성이 어마어마했습니다. 두 개의 합창단, 두 개의 오케스트라, 독창자들까지. 예수의 수난을 3시간에 걸쳐 그려낸 이 곡은 바흐 사후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응은 냉담했지요. "80년 된 교회 음악을 누가 들으러 와?" 멘델스존의 스승이기도 했던 베를린 징아카데미 지휘자 첼터는 공연장 대관조차 거절했습니다.
근데 멘델스존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스무 살짜리가.
결국 1829년 3월 11일, 베를린에서 마태수난곡이 80년 만에 다시 울려 퍼졌습니다. 공연장은 만석이었고 괴테도 그 소식을 듣고 감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멘델스존도 사실 바흐와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평생 주류 음악계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고, 사후에는 나치에 의해 음악사에서 아예 지워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동상이 철거되고, 악보가 불태워졌습니다.
바흐를 발굴한 사람이 나중에 역사에서 지워질 뻔했다는 것. 그리고 그 멘델스존이 다시 복권된 건 20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누군가의 음악이 세상에 남는다는 건, 재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그 음악을 발견하고, 누가 지키고, 누가 다음 세대에 넘겨주느냐의 문제입니다.
바흐는 운이 좋았지요. 스무 살짜리 청년이 할머니한테 받은 낡은 악보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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