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도시에서 혼자 살아남은 자유인

 모차르트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가 당대 음악가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선택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나 귀족의 녹을 먹는 궁정 음악가를 거부하고 빈에서 독립 작곡가로 살기로 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창작적 자유였지만 동시에 평생의 경제적 불안이었고, 그 긴장감이 다음 세 편의 오페라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1.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1786) 

황제 요제프 2세는 보마르셰의 원작 희곡이 귀족 특권을 조롱하고 계급 갈등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이유로 빈 공연을 금지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이 훗날 이 희곡을 "행동으로 옮겨진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위험한 내용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바로 그 금지된 희곡을 오페라로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대본작가 다 폰테는 황제에게 직접 청원해 허가를 얻어냈는데, 조건은 하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모두 제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 폰테는 원작의 정치적 언급을 삭제하고, 특히 피가로의 마지막 독백 — 귀족 특권에 대한 격렬한 비판 — 을 신부의 부정에 대한 아리아로 교체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겉으로는 정치색을 제거했지만, 음악으로 그것을 돌려놓았습니다. 프리메이슨이었던 모차르트는 사회 계급이 곧 인품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 하인 피가로가 영웅이고 백작이 속물인 구도는 바로 그 철학의 표현입니다. 

빈에서 반응은 미지근했지만 프라하에서는 달랐습니다. 모차르트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서는 피가로 얘기뿐입니다. 피가로가 아닌 건 연주되지도, 불려지지도, 휘파람으로 불려지지도 않습니다. 피가로 말고는 어떤 오페라도 사람을 끌지 못합니다." 



2. 돈 죠반니(Don Giovanni -1787) 

피가로의 프라하 열풍이 가져온 직접적 결과가 돈 죠반니 위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오페라의 탄생 과정은 전설적으로 무모합니다.

모차르트가 아내 콘스탄체, 다 폰테와 함께 10월에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 오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조금 미완성이 아니라 정말로 미완성이었습니다. 초연 3주 전인데도 2막 피날레 전체와 서곡이 없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초연 전날 밤인 10월 28일, 모차르트는 아직 서곡을 쓰지 않았다는 걸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지적받았습니다. 자정 무렵 방에 들어간 그는 아내 콘스탄체가 알라딘의 램프,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잠을 쫓는 사이, 약 세 시간 만에 서곡을 완성했습니다. 초연 당일 연주자들은 처음 보는 악보를 초견으로 연주했고, 관객들은 열광했습니다. 

프라하 신문은 사흘 후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모차르트가 직접 지휘를 맡았고,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설 때 세 번의 환호를 받았으며,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라하는 이런 작품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전문가들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초연 날짜는 오스트리아 대공비 마리아 테레사의 방문에 맞춘 10월 14일이었지만, 완성되지 않아 대신 피가로의 결혼을 무대에 올려야 했습니다. 왕족 방문용 공연도 준비 못 한 채 대체 작품을 올린 셈입니다. 



3. 마술피리(Die Zauberflöte-1791)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이자, 표면과 내면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작품입니다.

1791년 초, 모차르트는 오랜 지인이자 같은 프리메이슨 지부 동료인 배우 겸 극장주 에마누엘 시카네더와 손을 잡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재정적으로 쪼들린 상황이었고, 시카네더는 새 오페라가 흥행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겉으로는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동화풍 오페라지만, 그 안에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탄압받던 프리메이슨의 철학과 의식이 촘촘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에서 중요한 숫자인 3이 오페라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세 명의 시녀, 세 번의 시련, 세 개의 신전, 서곡의 세 화음, 그리고 오페라는 3개의 플랫이 있는 E♭ 장조로 쓰여 있습니다.

학자들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실제 인물의 알레고리라고 봅니다. 현명한 사라스트로는 빈의 저명한 프리메이슨 지도자 이그나츠 폰 보른이고, 밤의 여왕은 프리메이슨을 탄압했던 마리아 테레사 황후라는 것입니다. 

당시 프리메이슨은 교황청의 금지령 아래 귀족들에게 탄압받고 있었기에, 이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동화적 형식은 바로 그 위험을 감추기 위한 외피였습니다. 

차르트는 이미 병든 몸으로 작곡했고, 초연을 직접 피아노로 지휘했습니다. 오페라는 대성공이었고, 매 공연이 매진이었습니다. 초연 두 달도 채 안 된 12월 5일, 모차르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 오페라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

세 작품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궤적이 보입니다. 금지된 희곡으로 귀족을 음악으로 조롱한 《피가로의 결혼》, 초연 전날 밤 서곡을 쓰는 무모함으로 완성한 《돈 죠반니》, 그리고 죽어가면서도 동화 속에 자신의 신념을 숨겨 넣은 《마적》. 모차르트는 평생 체제와 비껴서면서, 오페라라는 형식을 자신의 가장 솔직한 언어로 썼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인생이 무너지던 여름, 그는 걸작을 세 편 썼다

사랑을 평생 숨긴 남자

모차르트는 왜 레퀴엠을 쓸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