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태어난 노래 - Verdi의 오페라 Nabucco



대부분의 블로그가 나부코를 "베르디의 출세작"으로만 소개하지만, 이 오페라가 탄생하기 직전 베르디의 상태를 알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됩니다.

1838년부터 1840년, 불과 2년 사이에 베르디는 딸, 아들, 그리고 아내 마르게리타를 차례로 잃었습니다. 아내 마르게리타는 뇌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두 아이도 그 전에 먼저 죽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무너졌고, 다시는 음악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직전 쓴 오페라 《운 조르노 디 레뇨》는 참담하게 실패했고, 베르디는 절망 속에 작곡을 영원히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840년 말, 라 스칼라의 기획자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우연히 그를 만나 솔레라가 쓴 대본을 건넸는데, 베르디는 그것을 집에 돌아와 테이블 위에 거의 폭력적인 몸짓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대본이 떨어지면서 펼쳐진 페이지에, 그의 눈이 저절로 고정되었습니다. "Va, pensiero, sull'ali dorate(날아라, 생각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라는 한 줄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그 대본을 세 번이나 읽었다고 스스로 회고했습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가사의 내용입니다. 바빌론에 끌려간 히브리 노예들이 "아름답고 잃어버린 나의 조국이여"라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 베르디가 그 가사에서 히브리 민족이 아닌 자기 자신 — 아이들과 아내를 잃고 삶의 근거지를 잃어버린 한 남자 — 을 보았을 것이라는 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추론입니다.

1841년 가을, 베르디가 악보를 완성해 메렐리에게 가져갔을 때, 메렐리는 이미 세 편의 오페라를 올리고 있다며 거절했습니다. 분노한 베르디가 항의 편지를 보낸 끝에 메렐리가 내건 조건은 하나였습니다.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에게 악보를 보여줘라, 그녀가 승인하면 올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디는 스트레포니를 찾아갔고, 두 사람은 함께 마차를 타고 바리톤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전해집니다.

나부코가 초연된 1842년은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시절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부르는 "Va pensiero"가 울려 퍼지자 밀라노의 벽마다 "비바 베르디(VIVA VERDI)!"라는 낙서가 번졌습니다. 이 문구는 사실 암호였습니다. VERDI는 "Vittorio Emanuelle Re D'Italia(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머리글자였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구호가 한 오페라 작곡가의 이름 뒤에 숨어 퍼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나부코의 초연 소프라노였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이후 베르디의 평생 반려자가 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오페라보다 더 드라마틱했습니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했을 때, 이웃들은 스트레포니를 무시했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길을 건너 반대편으로 피했고, 시장 상인들은 그녀에게 물건을 팔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베르디는 결혼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1853년, 사교계에서 매장당한 고급 창부 비올레타의 이야기 《라 트라비아타》를 썼습니다. 세상의 편견에 맞선 주세피나를 위한, 오페라로 쓴 사랑 고백이었던 셈입니다.

두 사람이 결국 결혼한 건 1859년, 그것도 사부아의 한 시골 마을 교회에서 비밀리에 치른 식이었습니다. 

베르디는 1901년 1월 8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밀라노의 거리에서 장례 행렬이 지나가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Va, pensiero"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 뒤, 그의 유해가 카사 디 리포소 묘지로 이장될 때 젊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800명의 합창단을 지휘해 그 노래를 불렀고, 30만 명의 인파가 함께했습니다. 

바빌론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히브리 노예들의 노래가, 60년 후 작곡가 자신의 장례식에서 이탈리아 전체의 애도가 된 것입니다.


* 이 글의 주제인 베르디의 오페라 Nabucco와 관련한 음악계에서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몇가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첫번째.  "Va, pensiero"가 초연 당일 앙코르를 받았다

가장 유명하면서 가장 많이 의심받는 이야기입니다. 이 화려한 역사적 장면 — 오스트리아 점령 치하 밀라노에서 관객들이 앙코르 금지령을 어기며 "Va, pensiero"를 다시 부르게 했다는 — 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현대 연구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Utah Opera 

당일 앙코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Va, pensiero"가 아니라 4막에서 히브리 노예들이 부르는 "Immenso Jehova"였다는 것이 현재의 학계 견해입니다. Wikipedia

두번째, 베르디는 처음부터 의도적인 애국 작곡가였다

영국 음악학자 로저 파커의 연구에 따르면, "Va, pensiero"가 청중과 비평가들로부터 특별히 주목받은 것은 초연 이후 수년이 지나, 1848년 혁명 이후였습니다. 리소르지멘토의 상징으로 신화화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는 겁니다. University of Michigan

심지어 베르디 자신도 나중에는 자신이 애국적 의도를 가지고 이 곡을 썼다고 믿게 되었을 정도로, 그 신화가 깊이 박혔습니다. Utah Opera

세번째, 대본이 펼쳐져 "Va, pensiero"를 보는 순간 영감이 왔다

베르디가 직접 회고한 이 유명한 장면 — 던진 대본이 마침 "Va, pensiero" 페이지로 펼쳐졌다는 — 도 후일담으로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됩니다. 베르디가 이 이야기에 신화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했다는 맥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한쪽에서는 그가 대본을 구석에 던져두고 수개월간 손도 대지 않았다고 전하고, 다른 쪽에서는 첫날 밤 세 번이나 읽었다고 전합니다. 어느 버전이 사실인지는 지금도 불분명합니다. L'Italo-AmericanoWNYC Stud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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